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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교분리로 본 한국교회의 역사 3 등록일 2018.02.09
글쓴이 백향나무지기 조회 429

정교분리로 본 한국교회의 역사 3

 

배덕만(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지난달부터 한국교회 정치참여의 역사에 대해서 배덕만 교수님께서 글을 연재해 주고 계십니다. 특별히 1945년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보수적 개신교의 정치참여를 중점으로 쓰신 글입니다. 지난호에는 1945-1960년대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와 정교분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호에는 1960-1987년까지 교회와 정치참여에 대한 부분을 살펴 보겠습니다.

 

2. 1960-1987

 

(1)4·19혁명과 개신교

군정과 제1공화국을 거치면서 한국교회와 정부의 유착관계는 견고해졌다.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 조항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를 향한 국가의 특혜적 지원은 지속되었고, 정부를 향한 개신교의 지지와 동원도 절정에 달했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공산주의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면서 정부와 교회의 동지적 연합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어쩌면 불가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착관계가 극에 달했을 때, 교회는 타락한 정권의 몰락과 함께 공동의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4·19 혁명으로 부패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면서 이 정권에 맹목적으로 면죄부를 부여하던 한국교회의 타락한 실체도 만천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4·19를 통해 폭로된 한국교회의 기만적 실체를 조성수는 다음과 같이 요약적으로 진술했다.

 

4·19 혁명으로 무너진 자유당 정권이 ‘기독교적 정권’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역사의식은 한국 기독교에 매우 심각한 고민과 무거운 과제를 안겨준다고 하겠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가 기독교적 덕목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면, 이러한 덕목을 뒷받침해야 할 기독교적 정권이 자유 정의 등의 그러한 덕목의 실천은커녕 오히려 그 말살에 동조 내지는 앞장선 것 같은 행위를 한 것은 민족사를 오도한 일대 오점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에 처음으로 도입된 민주주의 제도를 육성해야 할 기독교적 정권이 주권재민의 이념의 실천은 고사하고 부정부패 등으로 민족사에 낙인찍혀야 하다니,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기독교가 민주투사인 양 뽐내기 전에 민족사에 끼친 죄악을 정직하게 회개해야 할 것이다.

 

4·19를 목격하면서도, 다수의 교인들은 변화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은 시대적 요청에 피동적으로 반응할 뿐이었다. 장하구 목사의 증언처럼, “민족은 폭정에 반발하여 혁명을 성취하고 모든 언론은 드높은 혁명의 정신을 고창한다. 그러나 교회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겪이다. 혁명의 전야까지 무슨 뜻으로든지 간에 활발하던 대표인 교회신분은 이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부에 맹목적 지지를 반복하던 한국교회가 서서히 미몽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옹호하는 한, 정부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 묵인하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변호하던 교회가 마침내 자신의 역사적 과오를 깨닫고 자신과 정부를 향해 반성과 회개를 촉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제3공화국의 성립과정에서 다시 한 번 과거의 행태로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4·19가 한국교회의 사회적 인식과 반응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은 틀림없다. 혁명 1년 후에 발표된 김재준의 글에서, 우리는 교회의 변화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4·19 혁명은 암운을 뚫고 터진 눈부신 전광이었다. 그 윤리적 높은 행위가 일반의 양심의 자화상을 소출(塑出)시켰다. 교회도 이 섬광에서 갑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하여 구 정권의 악행에 교회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몸부림치는 교인들까지 생겨났다...교회는 국가적 집권자에게 자신을 일치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그 집권자를 교회자신의 편익을 위하여 이용하려 해도는 안 된다...국가를 절대화하려는 독재 경향이 익어감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에 교회로서의 경고를 제대로 발언하지 못했다는 것, 교회가 덧없이 집권자의 일치 의식에 자위소를 설치했다는 것, 교회가 대 건설사업에 활발하지 못했다는 것 등이 원칙적으로 반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4·19를 계기로, 한국교회 내에 정부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자기반성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정교유착의 견고한 고리를 끊으려는 시도가 교회 내부에서 최초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반성과 결단이 부패한 정권과 왜곡된 정교유착에 대한 진지한 자기반성의 결과가 아니라 교회 밖에서 주도된 4·19의 충격에 의한 피동적 반응이라는 것은 당시 교회의 근본적인 한계를 노출한 대목이다. 무엇보다, 이런 각성과 반성이 교회 대다수의 반응이 아니라 소수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은 뼈아픈 기억이다. 결국, 개신교가 박정희 정권의 출현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은 이런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2)박정희 정권과 개신교

5·16 군사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종교계와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독교에 편향적 태도를 고수했던 이전의 정권들과 달리, 군사정권은 모든 종교에게 중립적 자세를 유지했다. 그 결과, 개신교와 정권 간의 유착관계는 상당히 약화되고 차별의 대상이었던 전통종교들이 급부상했다. 형식적 차원에서나마, 정교분리가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정통성이 취약했던 군부는 정권유지를 위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했고 이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강하게 발생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정권에 대한 교회의 반응과 관련하여 개신교는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었다. 군사정권 내내, 개신교 진보진영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고, 그 대가로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반면, 보수진영은 군사정권을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지지했고, 그 대가로 선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으며 급성장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1969년을 기점으로 한국 개신교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보이며 양분되었고, 이후 극심한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군사정권 초창기인 1965년 6월 22일에 일본과 한일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한국은 보수와 진보의 구분 없이 이 협정을 굴욕외교라고 비판하며 격렬히 저항했었다. 동년 7월 1일, 김재준, 한경직, 강신명, 강원룡, 함석헌 등을 포함한 기독교계 인사 215명이 서명한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7월 5일과 6일에 영락교회에서 개최된 ‘국가를 위한 기도회’에 수천 명의 개신교인들이 참석했다. 하지만 1969년에 박정희 정권이 정권연장을 위해 헌법개정을 추진하자, 한국개신교는 진보와 보수로 확연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김재준, 박형규, 함석헌 등이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하자, 동년 9월 4일 김윤찬, 박형룡,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등 보수진영 목회자 242명이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을 발표하여 진보진영의 정치참여를 반대하고, “날마다 그 나라의 수반인 대통령과 영도자를 위해 기도하여야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태도”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인 5일에, 급조된 ‘대한기독교연합회’(DCC) 명의로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을 발표하여, “우리 기독교인은 개헌문제에 대한 박 대통령의 용단을 환영한다.”고 삼선개헌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민주화에 대한 분명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이후, 진보와 보수는 군사정권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삼선개헌을 둘러싼 갈등 속에 진보진영과 결별한 이후, 보수진영은 박정희 정권과 적극적으로 밀월관계를 추구한다. 보수진영은 정교분리를 외치며 진보진영의 반정부운동을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군사정권을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군사정권이 철권통치로 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며 장기집권을 획책할 때, 보수진영은 지속적으로 공개적 지지를 선언했다. 삼선개헌을 넘어 유신헌법까지, 이런 태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김준곤 목사의 주도 하에 1966년부터 시작된 국가조찬기도회는 정권과 교회가 호혜적 관계를 형성하는 효과적 도구로 기능했다. 최형묵의 평가처럼, “정권의 입장에서야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장도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교회의 입장에서도 체제를 뒷받침해주고 협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마리를 생각했다.” 국가조찬기도회의 효용성이 확인된 후, 이것은 ‘국무총리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조찬기도회로 진화했고, “원색적인 정권 및 정책에 대한 찬양이 행사장에 울려 퍼지곤 했다.” 그 외에도, 보수진영에서는 교단적·개인적 차원의 수많은 반공단체를 조직하여 위기에 처한 군사정부를 지원했다. 예를 들어, 1975년에 창립된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는 동년 7월 26일에 “세계교회에 보내는 한국교회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서 이 단체는 “아직까지 한국의 교회는 정부로 인해서 그 신앙이나 교회에 간섭이나 침해를 받은 일이 없고 선교활동도 큰 제약 없이 자유로이 계속 하고 있다...대한민국의 주권 없이는 이 땅에 교회도 없음을 인정하고 현 시국 하에서는 신앙수호와 국가안보를 우리의 제일차적인 과업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당시에, 진보진영이 군사정권의 가혹한 탄압 하에 있었지만 말이다.

보수진영의 친정부적 활동에 대한 국가차원의 혜택도 있었다.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에 정부는 개신교의 초대형 전도 집회를 허용 및 후원했고, 전군신자화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보수진영의 급성장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빌리 그레이엄 한국전도대회(1973),’ ‘엑스플로 74(1974),’ ‘77복음화대성회(1977)’가 여의도의 5·16광장에서 연속 개최되었다. 이 행사들을 위한 군사정권의 적극적 후원상황을 강인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박 대통령은 ‘빌리 그레이엄 한국전도대회’를 위해 범정부적 차원의 파격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한 보도에 의하면, “대회장 시설 및 진행을 위한 관계당국의 지원과 배려도 컸다. 군 공병대는 많은 장비와 병력을 투입했고, 매일 수십만 명이 넘는 청중의 안정을 위해 1천 8백 명의 경찰관이 동원됐다...서울시가 대회기간 중 여의도 일대의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한 것도 해방 뒤 처음의 특례”였다. 이 밖에도 관제행사 외에는 개방하지 않던 여의도 5·16광장을 특정 종교단체에 내준 것이나, 헬리콥터와 경비정까지 동원한 경비, 서울시가 수백 대의 버스로 하여금 여의도를 경유하도록 노선을 조정해준 것, 육군사관학교 군악대가 행사에 참석하여 찬송가를 연주한 것, 관영언론사들을 통한 대대적인 행사 보도 역시 그 어떤 시민적 조직들도 기대할 수 없는 특혜적 배려였다.

 

이런 대형집회를 통해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70년대 초 200만에서 1978년에 400만으로 크게 증가했다. 또한 1969년에 1군사령관에 부임한 한신 대장의 주도 하에, 전군신자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전군신자화운동의 출범 배후에는 군인들의 반공사상을 고취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이것은 군선교를 꿈꾸던 개신교의 욕구와 일치했다. 이 운동의 여파는 대단하여 “전경신자화운동”과 “전국교도소신자화운동”으로 확장되었으며, ‘전군신자화운동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리고 ‘전군신자화운동을 위한 후원회’가 창립되었다. 이런 환경 속에, “1971년부터 1974년 사이에 1천 명 이상의 대규모 합동세례식만도 무려 26회나 거행되었”고, “1971년부터 1974년까지의 4년 동안 개신교의 입교자는 120,258명, 천주교 입교자는 19,284명, 불교 입교자는 6,276명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중 세 종교 전체 입교자 145,818명 중 개신교가 82.5%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물론, 박정희 정권과 개신교 보수진영 간에 불협화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거국적 차원에서 발생한 한일협정체결반대투쟁에 교회도 합류했었다. 이것은 정치사회적 문제로 교회가 정부에 반대 입장을 공적으로 표명했던 거의 유일한 경우다. 반면, 개신교에 대한 정부의 큰 혜택에도 불과하고 정부가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여 사립학교의 종교교육 및 종교행사를 금지하려 하자, 양자 간에 갈등이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예를 들어, 1970년 3월 25일에 문교부장관이 발표한 ‘초·중·고등학교 종교교육 및 행사에 관한 지시’ 때문에, 기독교계 학교의 예배나 성경교육이 전면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이에 대해, 개신교는 KNCC 차원에서, 장로교 총회 및 노회 차원에서 진정서 제출를 정부에 제출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평가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개신교 보수진영은 정교분리를 이중적으로 해석·적용했다. 즉, 정부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던 개신교 진보진영을 향해, ‘교회의 정치참여 금지’란 의미에서 정교분리를 내세워 비판했지만, 자신이 정부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것에 대해선 동일한 의미의 정교분리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한편, 보수진영이 다양한 형태의 선교활동에 국가적 지원을 받았던 것에 대해서는 ‘국가가 특정 종교에 혜택을 베풀 수 없다’는 의미의 정교분리를 적용하지 않았지만, 몇몇 사항에 대해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종교자유를 내세워 국가정책에 반대했다. 물론, 그 강도가 세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결국, 정치적으로 이념적 교집합을 유지했고, 종교적으로도 국가적 혜택을 누리면서, 이 시기의 보수진영은 정교분리의 이중적 의미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적용하지 않고, 자신의 편의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적용했다.

 

배덕만 교수 | 느헤미야 기독연구원 전임 연구원이며, 바른교회아카데미 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