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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교분리로 본 한국교회의 역사 2 등록일 2018.02.09
글쓴이 백향나무지기 조회 464

정교분리로 본 한국교회의 역사 2

 

배덕만(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지난달부터 한국교회 정치참여의 역사에 대해서 배덕만 교수님께서 글을 연재해 주고 계십니다. 특별히 1945년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보수적 개신교의 정치참여를 중점으로 쓰신 글입니다. 2월호에는 미국과 한국의 정교분리의 법적 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달 부터는 시대를 구분하여 1945-1960년, 1960-1987, 1987년 이후의 보수적 개신교와 정교분리에 대해 차례대로 살펴보고 평가를 내리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이번 3월호에는 1945-1960년대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와 정교분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보수적 개신교와 정교분리(1945-1960)

 

(1) 분단·군정과 개신교

해방은 한국사회의 총체적 변혁을 초래했다. 분단과 군정을 통해, 한국은 냉전체제에 편입되었다. 북에선 소련의 점령과 김일성 정권의 형성과정에서 교회와 국가 간의 이념적·경제적 갈등관계가 형성되었다. 결국, 해방공간에서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월남함으로써 북한교회는 급격히 붕괴되고, 남한에선 기독교인들의 수가 급증했다. 동시에, 냉전체제 속에 실시된 미군정의 강력한 반공정책과 기독교우호정책을 통해, 교회와 정부 간의 밀월관계가 형성되었고 반공이 핵심적 정치이념으로 부상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교파 간에, 심지어 동일교파 내에 신학적 갈등과 차이가 존재했지만 반공과 친미라는 측면에서 일관되게 공통된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지도자들은 신자들의 적극적 정치참여를 독려하고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군정에 참여했다. 개신교는 군정으로부터 특혜적 지원을 받았으며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이 빠르게 상승했다. 당시에, 개신교인의 수는 전체 인구 중 3%에 불과했지만 개신교의 현실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먼저, 남한 개신교를 장악한 북한출신 목회자들은 해방공간에서 개신교인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촉구했다. 북한교회는 해방 직후 신속하게 기독교정당을 창당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정치참여를 시도한 경험이 있었다. 비록, 그런 시도들이 공산정권과의 갈등 속에서 실패했지만 미군정의 친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구현할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이런 입장은 당시 북한출신 신자들로 구성된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46년에 행한 “기독교와 정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한경직 목사는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역설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잠잠합니다. 최선의 정치 이념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다지도 퇴영적입니까? 좀 더 주도성을 가집시다. 십자가를 지고서 노동운동도 좋고, 정치운동도 좋습니다. 전후에 있어서 각국에는 기독교 민주당이 일어나 주도성을 가지고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보세요. 일어나 일하세요.

 

남한 개신교인들은 군정의 핵심적 지위들을 장악함으로써, 군정기간 동안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군정과 개신교의 밀월관계는 미군정의 다양한 역할수행(참모, 고문, 통역, 군목 등)을 위해 내한한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하지 장군의 보좌관 및 통역관으로 입국한 조지 윌리엄스(George Z. Williams)는 공주지역에서 활동했던 프랭크 윌리엄스(Frank E. C. Williams)의 아들로서 미군정의 인사문제에 깊이 개입했다. 그들은 반공사상과 영어실력을 갖춘 보수적 개신교인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그들이 군정의 요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구체적으로, 1945년 9월 미군정의 자문기구로 구성된 조선교육위원회의 위원 12명 중 7명이 개신교인이었고, 1945년 12월 미군정에 참여했던 한국인 국장 9명 중 확인된 개신교인들의 수만 6명이었다. 이것은 당시 개신교 인구가 3%였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개신교의 정치적 참여와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개신교와 군정 간의 정치적 친화성은 개신교에 대한 군정의 종교적 특혜로 귀결되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적산처리 과정에서 개신교가 누린 막대한 혜택이다. 신사와 천리교 건물들이 개신교 예배당으로 불하되었는데, 천주교와 불교에 비해 개신교가 압도적으로 큰 혜택을 누렸다. 당시, 서울지역 적산처리 최고 책임자가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와 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를 역임한 남궁혁 목사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런 혜택의 배경과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유교가 군정당국과 이념적 갈등 속에 법적 차별과 경제적 손실을 경험하는 동안 개신교는 다양한 선교영역에서 군정의 특별한 지원을 받았다. 허명섭의 다음 글은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상의 것을 통해 미군정은 좌익성향의 종교단체에 대해서는 법적 장치를 통해 규제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교나 불교에 대한 통제가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념적인 차원에서 행해졌다고 할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의 팽창억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이라는 정책수행의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로 여겨진다. 이런한 맥락에서 미군정은 기독교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미군정 하에서 방송선교, 형목제도 실시, 주일총선거일 변경, 주일의 공휴일 지정 등과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2) 건국·한국전쟁과 개신교

해방과 군정을 통해 형성된 반공과 친미 이데올로기는 교회와 군정의 밀월관계를 형성·강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는 양적·정치적으로 성장했고, 한국사회의 중심부로 진출했다. 개신교는 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이념적·제도적 후원세력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정부는 개신교의 든든한 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이런 교회와 국가의 우호적 관계는 건국과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감리교 장로였던 이승만과 개신교는 이념적·종교적 동질성을 유지했다. 특히, 한국전쟁이란 절체절명의 위기를 함께 통과하면서 그 동질성은 운명적 차원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천도교의 영향 속에 이승만 정권의 종교정책과 교회 간의 불협화음이 부분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고 자유당 정권의 실정 속에 양자 간의 견고했던 유착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에 기독교적 정체성을 주입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것은 이승만 정부와 개신교 간의 유착관계를 강화시켰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은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고 싶었다. 제헌국회에서 임시의장 이승만은 식순과 상관없이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와 제1공화국 간의 우호적인 유대관계를 예고하는 하나의 청신호였다.” 이후, 이승만은 개신교의 요구에 따라, 1948년에 국기배례를 주목례로 바꾸었고 1949년에는 성탄절을 공휴일로 정했으며 1951년에는 군종제도를 1954년에는 경목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개신교의 전도활동 및 교세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전쟁 복구기간 동안, 미국원조물자배분을 개신교가 거의 독점함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이 크게 고조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다양한 방식으로 개신교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고 이에 대해 개신교는 이승만을 향해 무한한 애정과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은 이승만의 선거운동에서 개신교 진영이 맹목적 지지를 선언하고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한국교회 내에 이승만·함태영 후보를 위한 ‘한국기독교선거대책위’가 조직되어 활동했고, 1954년 민의원선거와 1960년 정부통령선거(3·15부정선거)에서도 친정부적 선거운동을 노골적으로 전개했다. 결국,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양자 간의 유착관계는 지속되었다.

제1공화국 치하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한국전쟁을 함께 겪으며 절정에 이르렀다. 반공과 친미라는 국가이데올로기, 기독교라는 종교적 교집합을 공유했던 이승만 정권과 개신교는 북한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서로가 운명공동체임을 절감했다.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외치며 전쟁을 진두지휘할 때, 개신교 진영은 다양한 조직과 프로그램으로 전쟁에 참여하며 정권에 힘을 더했다. 전쟁기간 동안, 개신교는 ‘대한기독교구국회’(1950)와 ‘기독교연합 전시비상대책위원회’(1951) 등을 조직하여, 선무, 구호, 방송 등의 활동과 함께 지원병 모집에도 관여했고 미국대통령, 유엔사무총장, 맥아더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에 개신교는 공산주의를 악마로 규정함으로써 “반공주의의 종교화” 현상이 극단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승만과 개신교의 유착관계가 영구적이거나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58년 선거를 기점으로, 특히 3·15 부정선거를 거치면서, 개신교 내부에서 자유당 정부에 대한 강한 비판과 정교분리의 요구가 터져 나왔다. 비록, 다수의 개신교인들은 여전히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며 유착관계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이 정부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교회 안에 분열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며 양자 간의 유착관계도 예전과 같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또한 주일행사문제와 교회헌금문제에 대한 정부와 교회 간의 입장차이로 양자 간에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제1공화국 초기부터 주일선거문제로 한차례 갈등을 겪었고, 1950년대 중반부터 주일에 실시되는 각종 시험문제로 교회가 국가와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54년 8월에 국회에서 통과된 ‘기부금모집금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양자 간에 다시 한 번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 법안은 내무부장관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종교단체의 금품 거출을 금지, 정지, 혹은 감액시킬 수 있으며, 불응하는 경우에 사법처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개정안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기독교 박해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3) 평가

정교분리를 헌법에 명백히 규정하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 국가와 개신교 사이에서 이 법은 유명무실했다. 약간의 예외적 목소리들도 존재했지만 개신교 일반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활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국가정책에 적극 협력했다. 오히려 개신교는 정교분리를 무책임한 태도로 비판하고 정치참여를 시대적 사명으로 이해할 정도였다. 정부도 타종교에 비해 개신교에 특혜성 지원을 계속함으로써, 정교분리를 무색케 할 만큼 종교차별을 정책적으로 추진했으며 개신교는 이런 정부정책이 정교분리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이 시기에 정교분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정교분리에 대한 개신교의 인식도 매우 수준이 낮거나 자의적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개신교 안에 신학적 차이로 교단이 분열될 정도로 갈등이 있었지만, 친미반공이란 정치적 입장에선 대체로 통일된 모습을 유지했다. 즉, 신학적 진보주의가 정치적 진보주의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보수와 진보가 정치적으로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교문제와 관련해서 양자 간에 뚜렷한 차이는 없었다.

 

배덕만 교수/ 느헤미야 기독연구원 전임 연구원이며, 바른교회아카데미 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