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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교분리의 복잡한 역사: 한국의 보수적 개신교를 중심으로, 1945-2013 -바른교회아카데미 등록일 2018.02.09
글쓴이 백향나무지기 조회 540

정교분리의 복잡한 역사: 한국의 보수적 개신교를 중심으로, 1945-2013

요즘 평범한 가정에 식탁에서, 대학가의 커피숍에서도, 어디에 가더라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는 바로 ‘정치 이야기’입니다. ‘국민들이 정치 수업을 받고 있다’라고 할 정도로 정치에 대한 관심도는 계속해서 높아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앙인으로서 정치에 대한 견해를 가지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주변에서 문의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바른교회아카데미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정치참여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역사신학을 전공하신 배덕만 교수님의 아티클을 몇 개월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이번달에는 헌법에 기재된 미국과 한국의 정교분리에 대해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널에 실은 아티클은 각주를 제거한 버전입니다. 혹시 참고문헌이 필요하시면 gcacademy@hanmail.net 으로 요청해주시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I. 헌법과 정교분리

 

1. 미국과 정교분리

 

기독교와 깊은 관계를 맺어 온 서양은 근대사회에 진입한 이후 각자의 고유한 경험을 토대로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법적·현실적으로 재구성했다. 영국과 스페인 같이 국교제도를 유지하며 종교적 관용책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들이 있고, 독일과 이탈리아처럼 국교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종교를 공법인으로 대우하는 국가들도 존재한다. 동시에, 미국과 프랑스 같은 국가들은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경우, 정교분리의 내용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국의 경우, 종교로부터 국가를 분리시키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반면, 프랑스의 경우엔 국가로부터 종교를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들도 프랑스와 비슷한 이유에서 정교분리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국가와 종교의 관계 중,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모델은 미국의 경우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고 1789년에 연방헌법을 제정했다. 이때, 제6조 제3항에 “합중국의 어떠한 관직 또는 신탁에 의한 공직에 있어서도 그 자격과 관련하여 종교상의 심사를 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2년이 지난 1891년에 총 10조로 구성된 권리장전을 마련하여 연방헌법을 수정했다. 이 수정헌법 제1조에서 “미국 의회는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자유로운 신앙행위를 금지하거나 언론 또는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인민이 평화롭게 집회할 수 있는 권리와 불만사항의 시정을 위해 정부에게 진정하는 권리를 제한하는 것에 대한 법률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정교분리를 헌법으로 확정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조항에 대한 해석은 용이하지 않았다. 이 조항에 대한 법적 해석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고 이전의 판결을 뒤집는 새로운 판결들이 계속 이어졌으며, 무엇보다 오랫동안 이 연방헌법이 주정부들에 의해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조항이 주정부에 최초로 적용된 것은 1947년 Everson v. Board of Education 사례에서 수정헌법 제14조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후로 정교분리에 대한 법적·신학적 논쟁이 더욱 치열하고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지규철은 수정헌법 제1조의 의미와 다양한 해석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미국헌법 수정 제1조에는 정교분리의 원칙, 즉 국교금지조항이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정부나 법원이 교회재산과 종교내부의 종파분쟁에 간섭하여서는 안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을 확보하고 교회와 국가의 모든 형태의 결합을 금지하는 것이다. 국가가 재정적 원조를 하거나 종교활동에 호의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미연방판례에 의하면 ①법령이 비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②법령의 제1차적 효과가 종교를 금지 또는 촉진해서는 안 되며, ③국가와 종교의 과도한 대립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는 개념에 대하여는 (i)비유에 지나지 않는 비헌법적 개념이라는 견해, (ii)완전한 분리는 절대적인 의미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 (iii)분리는 관계의 존재를 나타내는 말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라는 등 여러 견해가 있다. 정부의 종교적 ‘중립’이란 개념도 종파(종교) 사이의 중립이냐, 종교·비종교 사이의 중립이냐가 문제되고, 모든 종교(종파)에 대한 공평한 지원의 금지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의 우대나 냉대를 모두 금지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처럼, 정교분리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강휘원은 분리의 정도에 따라, ①엄격 분리설 ②수용설 ③중립설로 분류했다. 엄격 분리설은 “정부와 종교는 최대한으로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부는 가능한 한 세속적이고 종교는 완전히 사적인 사회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수용설은 “사회에서의 종교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정부도 이를 수용할 것을 주장”한다. 끝으로 중립설은 “정부가 종교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하므로, 정부는 세속 기관에 비해 종교 기관을, 또는 특정 종교를 다른 종교에 비해 더 편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 이론은 “역사적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엄격 분리설이 미국 역사의 종교적 전통과 관행을 무시할 수 있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고, 수용설이 종교적 소수파나 비종교인을 무시하는 프로그램을 지지할 수 있는 문제가 있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안되었다.” 결국, 연방 수정헌법 제1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정교분리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법적 판결도 달라졌다. 그 결과, 미국에서도 이 문제로 인한 갈등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2. 한국과 정교분리

 

오랫동안 불교와 유교가 국교로 기능했던 한국사회에서 정교분리는 생각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교분리사상은 기독교의 전래를 통해 이 땅에 소개되었다. 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병인박해(1866)와 병인양요로 갈등관계에 있던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조불수호통상조약’(1886년)이다. 이 조약에 “한불양국이 상대국에서 ‘교회’(敎誨)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한국에 처음으로 선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이다. 1888년에 이르면 한국인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박영효는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종교란 국민이 자유로이 신봉하도록 맡겨 두어야 하는 것이며, 정부가 간섭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자고로부터 종교의 쟁론이 있으면 인심이 동요하고, 나라를 망하고, 목숨을 다치는 일이 수를 헤아릴 수 없으니 명심할 일입니다”라고 정교분리를 권유했던 것이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조선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일제의 침략과 수탈도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선교사와 일제에 의해 정교분리사상이 한국사회에 전달·확산되기 시작했다. 1901년 9월, 선교사들의 주도 하에 ‘조선예수교장로교공의회’에서 결의한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가지 조건’은 향후 정교분리에 대한 한국교회의 의식과 행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편, 을사늑약(1905)체결 후 초대통감으로 부임한 이등박문은 선교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정치적 교화는 자기가 맡을 테니 한국의 정신적 교화는 선교사들에게 위임한다고 발언했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목적보다 교회의 정치참여를 배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겨진 발언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정교분리가 헌법에 명시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4월 11일로, 상해에서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 제4조였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 이전 신체 급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이란 조항 속에 종교의 자유(신교의 자유)가 다른 자유들과 함께 포함된 것이다. 이런 헌법적 표현은 1948년 7월 17일에 선포된 제헌헌법 제12조에서 보다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모든 인민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갖는다. 국교는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 이로써, 대한민국도 미국 수정헌법 제1조와 매우 유사한 형태의 헌법조항을 갖추게 되었다. 이 제헌헌법의 이론적 초석을 놓은 유진오 박사는 이 조항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신앙의 자유는 종교적 행위의 자유와 종교적 결사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으며, 단 특정의 종교에 대한 신앙 또는 불신앙을 외부에 표명하는 자유와 신앙여하 또는 불신앙에 의하여 법률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는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 신앙 또는 불신앙을 공무에 취임하는 요건으로 하며 또 취학 의무를 인정한 학교에서 종교적 교육을 실시하는 것 같은 것은 본조에 위반하는 것이다. 이곳에 주의를 요하는 것은 본조의 신앙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와 함께 법률로써 하더라도 제한할 수 없는 절대적 자유로 되어 있는데—이것은 다른 자유가 제14조의 학문의 자유를 제외하고는 대개 법률로 제한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과 상이한 점이다—그것은 결코 미신의 자유를 인정한 것이 아니며, 또 종교를 빙자하여 행하는 범죄행위를 방임한다는 것은 아니다...종교와 정치의 분리 문제는 현재에 있어서는 그다지 중요성이 없는 것 같으나 역사상으로 볼 때에는 구미각지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너무 밀착하여 여러 가지 폐해를 야기하고 때로는 유혈의 참극을 일으킨 적도 없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고려 시대에 불교가, 이조 시대에 유교가 국교와 같은 대우를 받았으므로 금후 그와 같은 폐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주의적으로 본조에서 국교는 장래 두지 아니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이처럼, 제헌헌법에서 정교분리를 성문화하면서 종교자유를 (미신과 범죄인 경우를 제외하고) 법으로도 제한할 수 없는 절대적 자유로 규정했다. 국가와 종교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양자의 절대적 분리를 천명한 것이다. 하지만 4·19혁명 직후에 있었던 제3차 헌법개정(1960년 6월 15일)에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즉, 종교자유와 국교금지를 핵심으로 하는 정교분리 조항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제28조에 중요한 단서조항을 삽입함으로써 정교분리가 상대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 것이다. 제28조는 다음과 같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서 경시되지 아니한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서 제한할 수 있다. 단 그 제한은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훼손하여서는 아니되며,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를 규정할 수 없다.

 

2012년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정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는 단서조항을 삽입함으로써, 정교분리가 상대적 개념임을 명시하고 있다.

현재, 이런 헌법조항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이해는 다양하다. 정교분리를 교회의 정치참여금지로 이해하는 사람들, 국가의 종교 간섭을 배제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혹은 양자 간의 월권행위금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의 편차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한국사회에서 정교분리가 정교유착 혹은 정교갈등의 명분으로 사용되어 왔던 혼란스런 역사의 부정적 흔적이다.

 

(출처: 바른교회아카데미 


https://www.goodchurch.re.kr/single-post/2017/02/01/%EC%A0%95%EA%B5%90%EB%B6%84%EB%A6%AC%EC%9D%98-%EB%B3%B5%EC%9E%A1%ED%95%9C-%EC%97%AD%EC%